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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게파스 무역연합 2부 # ep.105~6
이름: Punch Line * http://O2pCLe 쥬세여


등록일: 2014-01-20 03:50 (175.208.81..***)
조회수: 1368 / 추천수: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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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겠네 진짜 시발

==

육부의 수장 회의 이후로 시간이 흘렀다. 준비는 착착 진행되었다. 연합 내부에서 은밀하게 진행되는 것이었기 때문에 떠들썩하진 않았다. 그러나 모든 수장들은 그 일이 준비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로얄 타운의 본사 XT-001에는 새로운 지하실이 하나 건설되었다. 그 지하실이 어떤 용도로 쓰이기 위해 만들어지는 지 아는 이들은 극소수였다. 1년, 2년, 3년이 잇달아 흘러갔다. 제라스는 완전히 일선에서 물러났고 공식적으로 벤쟐이 케미스터의 자리를 차지했다. 게파는 육부 수장 회의에서 히페르를 죽이기로 결정이 났던 그 날, 그 날 제라스를 찾아간 이후 그를 거의 보지 못하였다. 몇 개월에 한 번 꼴로 가끔 보긴 했지만 얼굴 정도만 다시 보는 수준이었다.

그는 알고 있을까?

게파는 내심 조마조마했다. 제라스는 자신의 연구실에 틀어박혀 있었기 때문에 외부의 정보는 거의 알지 못할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고의로 정보들을 차단한 것도 많았으므로 제라스는 연합 내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을 모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왠지 모르게 불안함은 가시지 않았다. 제라스는 정말로 모르고 있는 걸까?

다량의 폭약들이 운반되었다. 그리고 지하실은 완벽하게 윤곽을 잡았다. 직사각형 꼴에서 한 쪽의 움푹 튀어나온 구조를 가진 지하실은, 그 움푹 튀어나온 곳에 파니문의 집중점이 놓일 게이트가 자리 잡았다. 지하실은 전자기탑의 영향이 받지 않도록 되어있었다. 그리고 그 게이트 앞을 두꺼운 철문으로 막음으로써 폭발로부터 게이트를 보호하도록 설계되었다. 폭발 이후에 마나가 산산이 흩어질 때 전지를 끼고서 준비하고 있던 에테리얼이 민첩하게 철문을 열고 게이트를 통해 빠져나간다. 그리고 파니문이 게이트를 통해 지하실 안으로 집중점 상태로 이동하면, 벤쟐이 미리 조작해놓은 전력 장치가 파니문의 집중점이 유지될 만큼만 전류를 공급한다. 아주 정교한 조작이 필요했기에 벤쟐은 3년이나 시행착오를 겪어가며 전력 장치를 완성할 수 있었다. 파니문의 집중점이 지하실 내에서 유지되기만 하면 흩어진 마나는 파니문의 집중점에서 작용하는 고정력에 의해 파니문의 몸을 구성하게 될 것이었다.

계획은 완벽했다. 실행만이 남았을 뿐이었다.

조바심이 나는 쪽은 이제 연합 쪽이었다. 무대는 완벽하니 배우만 등장하면 되었다. 히페르는 언제나 신비주의라는 가당찮은 명목 아래에 불쑥불쑥 나타났으므로 그녀가 언제 등장할지 예측하는 것은 어려웠다. 연합은 북쪽과 남쪽에 제국들의 움직임을 주시하며 시간을 보냈다. 급변하는 정세 속에서 전쟁이 발발하리라는 건 거의 기정사실처럼 받아들여지고 있었다. 군수품들이 미친 듯이 오갔고 커다란 돈 줄기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런 혼란 속에서 게파는 파렐무어 제국과의 협상을 위해 황도 파렐라크로 향했다.



그리고 황도 파렐라크에서 그는 히페르와 재회했다.





“히페르...?”

게파의 손이 심하게 떨렸다. 정말 예상치도 못한 일이었다. 그는 좀 전까지 파렐라크의 황성에서 재상과 군수 물자 관련으로 담판을 짓고 왔고, 약간의 휴식 후에 로얄 타운으로 복귀할 생각이었다. 파렐라크의 번화한 시내를 지나쳐 XT-002 지부로 향하는 길에서 너무나도 익숙한 미모의 여성과 마주했을 때 게파가 느낀 당혹감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것이었다. 넓디넓은 대륙에서 이렇게 운명처럼 마주칠 수도 있는 건가? 게파는 히페르를 마주친 것에 대해 반가움보다도 당혹감이 앞섰다.

“와, 이게 누구야? 반가워요, 게파!”
“여긴 무슨 일로..?”
“방랑자가 꼭 무슨 일이 있어야 올까요? 그냥 발 가는 대로 거닐다보니 여기 파렐라크에 있네요! 이렇게 만나다니 정말 신비하네요!”
“신비주의의 은총이라도 되나보죠.”
“그럴지도?”

게파는 반가움에 겨워 웃는 히페르의 시선을 슬쩍 피했다. 그의 옆에는 그를 수행하기 위한 패솔리안 일곱 명이 있었다. 게파는 그들에게 먼저 지부로 돌아가 있으라고 말했고, 그들은 위험하지 않을까 염려했으나 게파의 확답에 지부로 돌아갔다.

“어디 앉아서 이야기할까요? 음, 인간들은 이렇게 이야기한다죠. 차라도 한 잔..?”
“깔깔깔, 차 드실 줄은 아세요?”

히페르의 웃음에 게파는 떨떠름하게 답했다.

“시늉은 될 겁니다. 입은 없지만요. 그러고 보니 레버넌스들도 먹을 수 있습니까?”
“안 먹어도 상관없지만 먹는 것도 가능하네요. 맛도 느낄 수 있죠.”
“대단한 특혜네요, 그거. 그럼 가시죠?”

게파와 히페르는 위치를 옮겨 주변의 노점에 자리 잡았다. 약간의 잡담과 그 동안의 이야기들을 거쳐서 게파는 히페르를 넌지시 떠볼 수 있는 상황까지 몰아갔다. 그가 말했다.

“북서부 대륙에 오신 지는 얼마나 되셨습니까?”
“음... 이제 1년 쯤 된 거 같은데요?”
“지금은 영 분위기가 좋지 않은데 말이죠.. 역시 제라스 님 때문에 오신 겁니까?”

게파는 직설적으로 내뱉었다. 히페르는 그를 보며 아미를 약간 찡그리면서 물었다.

“제리요? 제리가 왜?”
“예? 제라스 님께서 곧 자연 소멸하실 때가 되지 않았습니까.”

그 순간 히페르의 눈동자가 조금 흔들렸다. 그녀의 턱이 슬그머니 아래로 내려오면서 목 근처가 잔잔하게 떨리는 것이 보였다. 다시 입을 여는 그녀의 목소리는 한층 내려앉아 있었다.

“그렇네요. 제리도 이제 그럴 나이가 되었구나.”
“....아무리 오래 잡아도 십 년 이상 버티시지 못할 겁니다. 아마 삼사년 내로..”
“그래요. 약간은 씁쓸하네요. 당연히 알고 있던 사실인데.”

게파는 약간 머뭇거리다가 말했다.

“로얄 타운엔 오실 겁니까?”
“마지막이 되기 전에 한 번은 찾아 가야겠죠.”

오지 마십시오.

그 말은 하지 못했다. 떠오르는 건 빨랐지만 그 말은 소리로 바뀌어 나가지 못했다. 게파는 자신이 에테리얼이라는 것이 지금만큼이나 다행인 적이 없었다고 생각했다. 그의 표정은 절대로 읽히지 않는다. 그의 불안감도 절대로 읽히지 않는다. 목소리를 가다듬으면서 게파가 말했다.

“언제쯤 오실 생각입니까? 신비주의인가요, 이건?”
“신비주의가 아니라 진짜로 언제쯤 갈 수 있을지 저도 모르겠네요. 해야 할 일이 있어서..”
“너무 늦지 않는 것이 좋을 텐데요.”

히페르는 손가락으로 콧잔등을 긁적이며 알았다는 것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덧붙여서 말했다.

“확실한 건 올해 안에는 갈 수 있다는 거예요. 아, 그리고 항상 그랬던 것과는 달리 이번에는 저 혼자 방문하진 않겠네요."

혼자가 아니다? 게파는 그 말에 의아함을 느꼈다. 언제나 히페르는 혼자서 여행을 해오지 않았는가. 그런 그녀가 일행이 있다는 건 여러 가능성을 떠올리게 하여 게파를 복잡하게 만들었다. 히페르가 혼자 여행을 한다는 것은 어디까지나 게파가 수십 년간 보아왔던 그녀의 모습일 뿐이었다. 제라스도 히페르와 오래 전 함께 여행하던 동료가 아니었나. 그렇다면 오랜 시간이 흘러 히페르가 다시 일행을 만들었다고 해도 이상하진 않을 것이었다.

이렇게 되면 계산이 어려워진다. 연합 내에서 세웠던 계획은 어디까지나 히페르가 단독으로 왔을 경우만 생각했던 것이었다. 그러나 그녀 곁에 동료들이 있다면..? 인간일 경우 최악의 상황에는 그들을 죽여야 할 수도 있었다. 히페르를 흡수하기로 결정된 이상 인간을 죽이는 것을 머뭇거리지는 않을 것이다. 게파는 어쨌거나 확인을 위해 한 마디 했다.

“새로운 동료들입니까?”
“동료라고 하긴 애매하네요. 어디까지나 일을 위해서 모인 거니까요.”
“일이요?”
“이 일은 신비주의 원칙을 고수하도록 하죠. 아, 파렐라크도 사실은 이 일 때문에 왔답니다.”
“궁금하게 만드는 데는 도가 트셨군요. 하지만 신비주의 원칙이 나온 이상 더 말해줄 리도 없고.. 포기하도록 하죠.”

히페르는 씩 웃으면서 잘 생각했다는 뉘앙스를 풍겼다. 게파는 못 이기겠다는 것처럼 손을 내저으면서도 빠르게 계산을 시작했다. 올해 안에 로얄 타운으로. 그는 확실한 정보를 손에 얻었지만 아직 불확실한 요소들이 걸렸다. 일을 위해서 모인 이들이 히페르와 함께 로얄 타운으로 온다. 아마도 인간일 확률이 높지만 히페르가 꼭 인간만 일행을 두진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만일의 경우를 대비해 확인을 해야 했다. 게파는 히페르를 떠 볼 생각을 하며 어떻게 해야 자연스럽게 정보를 얻어낼 수 있을지 머리를 굴렸다.

그러나 그의 수고로움은 그럴 가치가 없는 것이었다.

“뭐하고 있어?”

히페르 어깨 너머로 들려오는 낯선 목소리. 게파는 그 목소리의 진원지를 찾아 고개를 쭉 위로 세웠다. 그곳에는 큰 키를 가진 두 명의 사내가 서있었다. 둘 다 185cm 쯤 되어 보이는 큰 키에 훤칠한 이목구비를 가지고 있었고, 복장은 북서부 대륙의 복장이라기엔 둘 다 굉장히 추워보였다. 너덜너덜하게 찢어진 레더 재킷에 쪼가리라고 봐도 무방한 스웨이드를 걸친 그들을 보며 게파는 이질적임을 느꼈다. 히페르가 인간들의 기준으로 굉장히 미녀이듯 그들 역시 굉장한 미남들이었다. 미모와 기이한 분위기, 그리고 복장. 게파는 본능적으로 그들이 인간이 아니라고 판단했다.

“아, 아테락, 틸레스. 오랜 친구를 만났어.”
“그래? 그럼 좀 이따 올 거야?”
“아니. 지금 갈게.”

히페르가 자리를 떠나려 했다. 게파는 본능적으로 아테락과 틸레스라는 이들이 인간처럼 보이지만 인간이 아닌 존재, 인간으로 위장하고 있을 뿐인 존재, 즉 레버넌스라고 알아차렸다. 그러나 확인이 필요했다. 히페르가 자리에서 일어날 때 게파가 물었다.

“레버넌스들이 모여야 할 정도로 중요한 일입니까?”
“눈치가 좋네요, 게파. 아테락과 틸레스 모두 레버넌스라는 건 어떻게 아셨어요?”
“느낌이 비슷하더군요.”
“그런가요?”

히페르는 일어난 상태에서 턱을 짚고서 뭔가 생각하더니 게파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제리한테는 말해두는 게 좋을 것 같네요. 가서 전해줘요, 게파. 전 지금 페텔과 칼라샤의 자식들을 위해서 뭔가를 하고 있어요. 정확히는 페텔과 칼라샤의 딸과 손자가 되겠네요. 올해로 그 손자가 일곱 살이 되었답니다. 그리고 전 그 꼬마를 위해서 깜짝 선물 같은 걸 준비하고 있다고, 그렇게 전해줘요. 아시겠죠? 아, 그 꼬마는 보랏빛 머리칼이 아주 예쁘고 또 웃는 모습도 정말 예뻐요. 정말 예쁜 아이라고 말해줘요.”

게파는 멍하니 히페르를 올려다보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히페르는 예의 그 미소로 화답하고는 아테락과 틸레스라는 이름을 가진 레버넌스 둘과 함께 노점을 벗어나 총총 파렐라크의 인파 사이로 사라졌다. 게파는 그 자리에 한동안 앉아 있다가 XT-002 지부로 향했다. 그는 일말의 휴식도 가지지 않고 곧바로 로얄 타운으로 향했다. 로얄 타운으로 돌아온 그는 업무 보고 이전에 먼저 제라스의 연구실로 향했다. 그는 매캐한 연기와 수많은 화학 약품들, 그리고 가득 찬 플라스크와 비커들을 지나쳐서 제라스와 마주할 수 있었다.

“뭐냐.”

제라스는 퉁명스럽게 말했다. 게파는 그 연기 사이에서 가까스로 앉을 만한 자리를 찾아내어 앉을 수 있었다.

“히페르를 만나고 왔습니다.”
“...히페르를?”

제라스의 목소리가 옅게 진동했다. 게파는 무뚝뚝하게 말을 이어나갔다.

“올해 안에 온다는 모양입니다. 자연 소멸하시기 전에 말이죠.”
“올해? 올해라..”

제라스가 신경질적으로 비커를 옆으로 밀쳐냈다. 그는 탁자에 한 아름 쌓인 책무더기를 파헤치면서 게파에게는 시선도 던지지 않았다. 게파는 히페르에게 들었던 말을 기계적으로 내뱉었다.

“지금은 일을 하나 하고 있답니다.”
“일? 무슨 일?”
“페텔과 칼라샤의 자식들을 위한 일이라는군요.”
“페텔과 칼라샤의 자식들? 그 녀석들의 딸아이 말하는 게냐?"
“손자가 일곱 살이 되었다는군요.”

제라스의 손이 멈추었다. 탁자 위의 잡동사니들을 거칠게 헤집던 그의 손은 거짓말처럼 멈추어서 미동도 하지 않았다. 잠깐 동안의 침묵이 흘렀다. 침묵을 비집고서 겨우 말을 꺼내는 제라스의 어조에선 동요하는 감정이 많이 섞여 있었다.

“두 녀석 다 살아있었다면 좋아했겠군..”
“히페르는 그 손자를 위한 깜짝 선물 같은 걸 준비하고 있다더군요. 그 일이 끝나면 로얄 타운에 오겠답니다.”
“몹쓸 짓을 하는군.”

제라스는 씁쓸한 어조로 중얼거렸다. 게파가 딱딱하게 되물었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그 아이에게 몹쓸 짓을 한다는 기분이 들어.”
“히페르가 말입니까?”
“아니. 내가.”

제라스의 말에선 어떤 힘 같은 것이 느껴졌다. 게파는 약간의 압박감을 감지했다. 그는 뭔가를 알고 있는 것 같았다. 게파의 손아귀에 힘이 들어갔다. 그 순간 탁자 위의 잡동사니들에 집중하던 제라스의 시선이 게파에게 향했다. 게파는 그 시선을 맞받아칠 수가 없었다. 그는 저항하지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여기서 이러고 있다간 읽혀버릴 것 같은 기분이 들었기에 게파는 화급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뒤늦게 자리를 뜨면서 제라스에게 말했다.

“그 아이, 머리칼은 보라색이고 웃는 모습이 아주 예쁘답니다.”

제라스는 대답하지 않았다. 게파도 뭐라 더 할 말은 없었다. 게파는 연구실 바깥으로 나갔다. 그의 등 뒤로 여전히 연기들이 치솟아 올랐다. 그 어떤 상념들도 거부하면서 게파는 연기와 함께 제라스를 닫아걸었다. 그는 연구실 문을 닫았다. 여전히 약품들 사이에 파묻혀있는 그의 모습을 아로새기면서 그는 연구실 앞을 떠나 대상의 집무실로 향했다.

파니문이 있는 집무실의 문을 연 게파는 파니문이 기다리고 있음에 딱히 놀라지는 않았다. 그는 게파가 파렐라크에서 제국과의 협상 결과를 가져오길 기다리고 있었을 것이다. 게파는 파니문에게 업무 보고를 간략하게 끝마친 후 히페르의 이야기를 꺼냈다. 천하의 파니문도 게파가 꺼낸 이야기에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히페르를 만났다고?”
“네. 파렐라크에서 우연히 마주쳤습니다.”
“굉장한 우연이군. 어땠나?”

게파는 그 말이 무엇을 묻고 있는 건지 잘 알았다.

“올해 안으로 찾아온다는 모양입니다. 준비는 다 마쳤으니 딱 적절한 시기가 되겠군요.”
“그래. 정말 적절한 시기로군.”
“그것보다도 더 큰 소식이 하나 있습니다.”

파니문의 금강석 선장이 흠칫했다. 그의 관심이 게파에게 쏠렸다.

“올해에 로얄 타운을 방문할 때에 두 명의 일행을 대동한다는 소식입니다.”
“일행? 그건 계산에 없던 건데. 하지만 그렇게 큰 소식은 아니군. 방해가 될 것 같은 녀석들이라면 제거하면 그만이다.”
“그뿐이라면 말씀드리지 않았을 겁니다. 그 두 명의 일행 모두 레버넌스이기에 큰 소식이라고 말한 겁니다.”

파니문의 손가락이 선장의 윗부분, 금강석이 박힌 부분을 거미처럼 훑어나갔다. 그는 게파의 말에 충격을 어느 정도 받은 것 같았다. 회복되는 데는 몇 초의 시간이 걸렸다. 약간의 뜸을 들이고서 그가 말했다.

“레버넌스가...셋..?”
“그렇습니다. 셋입니다.”
“....좋은 소식이라고 봐야겠군. 힘이 강해서 나쁠 건 없지.”
“감당하지 못할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파니문이 발이 불안한 것처럼 바닥을 여러 번 두들겼다.

“변수가 더 많아졌다는 건 분명하다. 하지만 잘만 하면 더 큰 기회가 될 수 있는 것도 분명한 사실이지. 하나가 되었건 셋이 되었건 그만한 양의 화약이 폭발하는 순간 흩어지는 건 매한가지일 거다. 요는 어떻게 유인하느냐에 걸렸지.”

게파는 잠자코 고개를 끄덕였다.

“알레토는 그 일을 마다하고 있다. 벤쟐은 전력 장치를 제어해야 되기 때문에 불가능하지. 그러니 게파, 네가 히페르와 나머지 레버넌스들을 유인하는 역할을 해야겠다. 문제 없겠지?”

게파는 망설이지 않고 답했다.

“문제 없습니다.”
“좋아. 아마도 네가 가져온 소식은 희소식이 될 것 같군. 하나로도 충분한데 셋이라! 굉장한 힘이 될 것이다.”
“연합에게 큰 힘이 되겠지요.”
“그래, 그렇겠지.”

게파는 파니문을 향해 인사하곤 집무실을 나왔다. 어떻게 해야 최대한 자연스럽게 히페르와 그 일행들을 속여 넘길 수 있을지 고심하면서 그는 사무실로 향했다. 익숙한 자리와 익숙한 문서들, 익숙한 얼굴들 속에서 게파는 익숙하지 않은 고민을 해야했다. 어떻게 그녀를 속일까? 몇 가지 방법들을 떠올리면서 그는 책상을 치웠다.




*



“망할, 이거 진짜 장난 아닌데?”

그릴로의 피비린내 나는 몸속. 흔들리는 몸체 속에서 힘들게 균형을 잡으면서 언노운은 미리 뚫어놓은 구멍으로 바깥 상황을 계속 살폈다. 그가 보고 있는 것은 그릴로들의 부락이었다. 수호 산맥의 그 누구도 여태까지 확인하지 못했던 그릴로들의 부락. 그릴로들을 연구하는 것에 있어서는 아주 큰 성과를 거둔 셈이지만 언노운과 퀼츠가 그깟 연구 따위에 관심이 있을 리가 없었다. 그릴로들의 부락은 커다란 굴들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그것은 자연적으로 만든 굴들이 아니었다. 그들은 집채만 한 바위들을 가져다가 완력으로 때려 부수어 공간을 만들고 그것을 집으로 삼아 생활하는 것이었다. 아무도 몰랐던 그릴로들의 생태에 대해 알게 되었다는 건 언노운에게 어떤 기쁨도 주지 못했다.

그것보다도 압박을 넘어서 압도하는 크기를 가진 인공 바위집 십여 개와 그 안의 그릴로들을 보면서 언노운은 숨이 턱 막히는 것 같았다.

“크릉, 어마어마하다..”
“걸리면 뼈도 못 추리겠네.”

언노운은 긴 머리칼을 질끈 동여매면서 조심스레 상황을 더 지켜보았다. 폭군 그릴로는 동료 그릴로의 시체를 운반하고 있는 다른 그릴로들에게 시체를 내려놓도록 지시했다. 그릴로들의 바위집들은 둥글게 배열되어 있었고 그 한가운데에 공터가 있었는데 바로 그곳에 언노운과 퀼츠가 숨어있는 그릴로의 시체가 놓여졌다. 바위집에 있던 그릴로들은 시체가 놓여지자 밖으로 나와 그 시체 앞에서 이상한 목소리들을 내기 시작했다.

“젠장, 이게 무슨 소리야?”

언노운은 귀를 틀어막았다. 그것은 그저 괴성에 불과했지만 계속해서 듣다 보니 어떤 의미를 가진 곡조인 것 같기도 했다. 그릴로들의 진혼곡인가? 그는 흥미를 느꼈지만 그것에 치중할 멍청이는 아니었다. 그들에게 있어서 지금 상황은 극한의 위기였으니까. 이윽고 진혼곡을 끝마친 그릴로들은 공터를 떠나 바위집들 너머로 쿵쿵거리면서 사라졌다. 폭군 그릴로 한 마리만 남아서 공터 옆의 자신의 것으로 보이는 커다란 바위집으로 들어갔다.

“뭐지? 죄다 어딜 간 거야?”
“크르릉.. 잘은 모르겠지만 무슨 준비를 하려는 것 아닐까?”
“장례 준비? 나름 할 건 다 하는 녀석들일세!”

언노운은 구멍으로 눈을 가져다 대면서 폭군 그릴로의 동태를 살폈다.

“지금 나가면 저 녀석을 이길 수 있을까?”
“말도 안 되는 소리인 것 같다, 크릉. 저 녀석이 무리의 우두머리인 만큼 굉장히 강할 거다.”
“그래. 양쪽 눈을 잃은 일반 그릴로도 그렇게 강했는데 저 녀석이라면 말할 것도 없겠지.. 게다가 전투 중에 소란을 듣고 다른 그릴로들이 돌아오기라도 하면 답도 없군.”
“무슨 생각이라도 있나, 크릉?”

언노운은 배낭에서 육포와 비스킷을 꺼내었다. 우선 먹고 생각하자는 의미였다. 퀼츠는 흔쾌히 그 생각을 받아들였다. 그들은 조용히 육포와 비스킷을 씹으면서 허기를 달래었다. 긴장되는 식사를 끝마치자 언노운이 입을 열었다.

“우리가 여기서 빠져 나가려면 어떻게 해야겠냐?”
“그걸 내가 알 리가 없지 않나, 크릉.”
“이 밖으로 몰래 나간다쳐도 이렇게 냄새를 풍겨서야 곧 잡히고 말겠지. 우리가 시체 안에 있으니 저 놈들이 눈치 채지 못하는 것뿐, 밖으로 나가서 시체 냄새를 풍기고 있다간 쫓기는 건 시간 문제지. 그럼 밖으로 나가긴 어렵다는 건데..”
“때려눕히는 건? 킁.”
“진짜 그걸 고려하고 있냐, 멍멍아?”

퀼츠는 기분 나쁘다는 듯 코웃음 치는 걸로 답했다. 퀼츠 역시도 근 스무 마리에 가까운 그릴로들과 싸운다는 건 말도 안 된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한 마리도 벅찬 놈들이었다. 두 마리만 되어도 퀼츠와 언노운은 버티지 못할 것이었다. 게다가 그들은 몸 상태도 퍽 좋지 않았다. 백 명에 달하는 레인져들과 혈투를 벌였고 하루걸러 바로 그릴로 한 마리와 치열한 사투를 벌였다. 탈진해도 이상할 게 없는 상황이었다.

“지금 떠오르는 건 한 가지 정도밖에 없어.”
“그게 뭐냐, 크릉?”
“늑대 무리 같은 경우엔 우두머리 늑대가 당하면 집단이 무너지지. 이 녀석들은 늑대보단 더 고등한 것 같다만.. 어쨌든 늑대처럼 우두머리 한 놈만 어떻게 해본다면 죄다 무너질 지도 모르지. 어디까지나 가설일 뿐이지만.”
“그렇지 않다면..?”
“우두머리를 쓰러뜨려도 이 녀석들이 여전히 달려든다면 어쩔 도리가 없지. 하지만 이렇게 죽을 바에야 그 편이 낫지 않겠냐, 멍멍아?”

퀼츠는 불만스럽게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언노운은 바깥을 관찰하면서 여러 가지를 눈에 담더니 몇 가지 더 눈에 띠는 것들을 찾아내었다.

“저 큰 바위들 모두 운반된 거군. 바닥에 패인 자국들이 남아있어. 워낙 무거운 바위들이니까 자국이 오랫동안 남기는 하겠지만 아주 오래된 거라면 남지 않았겠지. 그러니까 이 바위집들은 생긴 지 그렇게 오래된 것들은 아니라는 거지.”
“그건 무슨 뜻이냐, 킁?”
“어쩌면 저 폭군 그릴로 하나 때문에 이렇게 모인 걸 수도 있단 이야기다. 너처럼 무리의 특출한 돌연변이라고 봐도 되겠지. 아, 너는 혼혈이지?”

퀼츠는 자신을 ‘특출하다’라고 표현해주었으니 칭찬이라고 받아들여야 되는 것인지, 아니면 항상 자신을 화나게 하는 혼혈이라는 표현에 얼굴을 붉혀야 되는 건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언노운은 그러거나 말거나 좀 더 정황을 지켜보았다. 퀼츠는 배낭에서 육포를 한 조각 더 꺼내어 입에 털어 넣으면서 물었다.

“저 녀석 한 놈만 쓰러뜨린다고 치더라도, 엄청나게 강해보이는 저 녀석을 어떻게 쓰러뜨릴 거냐, 크릉?”
“지금 그거 생각하고 있잖아. 젠장, 정면으로 붙어서는 절대로 못 이겨.”

언노운은 초조하게 생각에 몰두했다. 딱히 뾰족한 수는 떠오르지 않았다. 아무런 대안도 내놓지 못하고 시간은 흘러갔다. 쿵쿵거리는 소리와 함께 그릴로 떼들이 다시 돌아왔다. 언노운은 돌아온 그릴로들이 양팔에 한 아름씩 나뭇더미들을 들고 온 것을 보았다. 언노운과 퀼츠는 마른침을 삼키며 그릴로들이 무엇을 할 요량인지 집중해서 바라보았다. 폭군 그릴로가 무어라고 다시 소리치자 그들은 아까 불렀던 것과 비슷한 곡조의 진혼곡을 부르면서 나뭇더미들을 시체 주변에 내려놓았다.

나무들을 보는 순간 언노운의 머리에선 가장 기본적이지만 확실한 방법이 떠올랐다. 그는 배낭을 뒤지기 시작했다. 그에 맞추어 그릴로들은 진혼곡을 계속 부르며 나뭇더미들을 사각형 모양으로 배열하여 시체 주변으로 쌓기 시작했다. 곧 그릴로 시체는 사각형 모양으로 배열된 나뭇더미 안에 위치하게 되었다. 그릴로들의 크고 투박한 손을 고려하면 아주 정교하고 정성 어린 손길들이었다. 그들은 나뭇더미를 높게 쌓아올려 나갔다. 인간들의 블록 쌓는 놀이처럼 그릴로들은 사각형 모양을 유지하면서 시체에 닿지 않게 하며 시체를 둘러싼 나무탑을 쌓았다. 거의 그릴로들의 키만큼 쌓았기에 그것은 인간의 입장에서 탑이라고 하기에 충분한 크기였다.


“크르렁, 인간들의 장례법 중 이렇게 나무를 쌓아놓고 불로 태우는 방법이 있다고 들었다. 혹시..”
“설마 그릴로들이 화장을 하진 않겠지. 불이 어디 있다고? 이건 목장이라고 불러야 될 것 같은데. 어감은 좀 웃기지만.”

그렇게 말하며 언노운은 배낭에서 유리병들을 꺼내었다. 유리병 안에는 노란 기름이 찰랑이고 있었다. 언노운이 기름병들을 들고 있는 것을 본 퀼츠는 언노운의 생각을 눈치 챘다. 불을 붙이려는 속셈인가? 퀼츠가 말했다.

“불을 붙이려는 건가?”
“이 멍청이들에게 화장이라는 걸 알려줄까 해서.”

언노운은 그렇게 말하며 나무들을 살폈다. 건조하게 잘 굳은 나무들이었다. 눈과 직접 맞닿고 있는 바닥을 제외하고, 나무 무덤의 중간 부분쯤부터는 기름까지 이용하면 꽤 잘 불탈 것이었다. 퀼츠는 언노운에게 불안한 어조로 물었다.

“우리까지 타죽지 않겠나, 크릉?”
“타이밍을 잘 잡아야지.”

언노운이 뭐라 더 말을 덧붙이려는 찰나에 그릴로들이 움직였다. 나무를 쌓아서 무덤을 만든 그들은 이제는 한 움큼씩 눈을 퍼오기 시작했다. 역시나 그릴로들 치고는 조심스러운 손이었다. 워낙에 거대한 손이었기 때문에 조금만 깊이 눈을 푸면 그 아래 지반의 흙들까지 딸려 나오기에, 그릴로들은 눈만 푸기 위해 섬세하게 움직였다. 그들 나름대로의 경건함이 엿보이는 모습이었다. 언노운은 그 사이에 남는 깡통 안에 부싯돌로 불을 붙였다.

눈을 가득 모은 그릴로들은 나무 무덤을 눈들로 덮기 시작했다. 나무로 틀을 잡고 눈을 덮어서 완성하는 무덤. 그릴로들의 독특한 매장법을 보며 언노운은 감탄했다.

“이건 뭐 설장이라고 해야되나?”
“크릉, 그게 대수인가? 그것보다도 눈에 완전 덮여버리면 불을 붙일 수가 없잖나!”
“그쯤은 나도 알아, 멍멍아. 내가 개 대가리인 줄 알어?”

퀼츠는 포효를 내지르며 한바탕 하고 싶었지만 모두 죽는 길밖에 되지 않음을 잘 알기에 잠자코 있었다. 언노운은 조바심 내지 않고 점점 덮여가는 눈 더미들을 지켜보았다. 커다란 그릴로들이 눈앞에서 왔다 갔다 하는 것은 굉장한 위압감을 주었다. 그들은 나무틀을 중심으로 아래부터 차곡차곡 눈을 쌓아나갔다. 언노운은 대검의 예리한 날로 그릴로 시체의 가죽을 소리 없이 베어 밖으로 나갈 공간을 만들었다. 그는 공간을 만든 후 대검을 등에 가새질러 단단히 매었다. 그리고 왼손에 불씨가 든 깡통을 잡았다. 퀼츠는 배낭을 메고 기름병들을 쥐었다.

“자, 그럼 가보자고.”

그릴로들의 강력한 힘 덕에 눈은 금새 쌓였다. 이미 누워있는 그릴로의 시체는 쌓인 눈들에 의해 잘 보이지 않았다. 언노운은 지금쯤 밖으로 나가면 눈에 의해 시야가 가려져 자신들이 보이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옆구리 가죽을 들춰내고서 언노운이 먼저 밖으로 나갔다. 퀼츠가 그 뒤를 따랐다. 예상대로 그릴로들은 언노운과 퀼츠를 눈치 채지 못했다. 그러나 나무틀에 맞추어 눈을 더 쌓아올리다 보면 언노운과 퀼츠를 발견하는 것은 어렵지 않을 것이었다. 언노운은 퀼츠에게 손짓했다.

눈은 대략 2m 쯤 쌓여있었다. 그 위로는 아직 눈으로 된 살이 붙지 않은 나무 뼈대가 3m나 더 치솟아 있었다. 언노운은 그 나무 뼈대들 세 곳을 가리키고선 고개를 세차게 휘둘렀다. 퀼츠는 기름병 세 개를 그 곳에 정확하게 명중시켰다. 쨍그랑하는 소리와 함께 기름이 사방으로 튀었다. 하지만 워낙 나무 뼈대들이 컸기 때문에 조그만 기름병 세 개는 별 것 아닌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언노운이 재빨리 깡통 안에서 불씨를 머금은 조각들을 기름이 묻은 곳에 던지자 조그만 기름의 흔적들은 커다란 불꽃으로 일순간에 퍼져나갔다.

“그우워어어어어엉-!”
“그워어어엉!”

그릴로들의 비명 같은 괴성들이 울려 퍼졌다. 언노운은 그릴로들이 과연 불꽃이라는 걸 알기나 할까 의문이 들었다. 이런 눈밖에 없는 설산에서 불구경을 하기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리라. 어쨌거나 그릴로들은 굉장한 패닉 상태에 빠졌다.

언노운과 퀼츠는 머리 위의 나무들은 불에 타고, 아래의 나무들은 눈에 둘러싸인 기괴한 광경 속에 있었다. 불꽃에 흥분하여 날뛰는 그릴로들 십여 마리는 지진을 방불케 했다. 쿵쾅대는 울림에 언노운과 퀼츠는 머리가 깨질 것 같았지만 머리 아파할 만한 여유조차 용납할 상황이 못 되었다. 눈과 불꽃의 넘실거림 속에서 언노운은 냉철하게 틈을 찾고 있었다. 그의 귀에는 더 큰 울림소리가 들려왔다. 폭군 그릴로가 움직이고 있었다.

폭군 그릴로의 소리로 여겨지는 발소리에 주의하던 언노운은 나무 뼈대들이 흔들리고 있음을 느꼈다. 이젠 난동을 부리기 시작하는 그릴로들이었다. 몇몇은 불꽃을 어떻게 해볼 생각인 듯 눈들을 뿌려대기 시작했다. 언노운과 퀼츠는 졸지에 쏟아지는 눈을 맞게 되었다. 거의 폭설 수준으로 떨어지는 눈들이었다. 건조된 나무와 기름의 힘으로 탄생한 화염이 눈을 만나자 눈이 녹아내리면서 연기가 치솟아 올랐다. 더욱 흥분한 그릴로들은 괴성과 함께 주변을 휘저었고 나무 뼈대가 결국 버티지 못하고 무너지기 시작했다.

우르르릉-!

“크릉, 이거 위험하지 않나?”
“잠깐 기다려..”

언노운은 어나더 원 바잇 더 더스트를 다시 꺼내어 들었다. 그는 자신 앞을 막고 있는 눈을 커다란 대검으로 갈랐다. 눈 사이에 틈이 생겼다. 언노운은 자신의 어깨를 그 틈에 들이밀었다. 그리고 그 순간에 버티지 못한 나무들이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위에서부터 무너진 나무들은 아래로 아래로 떨어졌다. 위의 나무들은 불꽃에 휩싸여 있었고 매캐한 연기를 내뿜어 대었다.

“가자!”

언노운은 눈의 갈라진 틈새에 힘껏 어깨를 들이밀었다. 눈 더미가 무너지면서 언노운과 퀼츠가 빠져나갈 구멍이 생겼다. 언노운과 퀼츠는 바깥으로 뛰쳐나왔고 그들이 있던 곳엔 곧바로 화염에 휩싸인 나무들이 떨어졌다. 떨어진 나무들은 일부는 눈 더미와 부딪혀 더 큰 연기를 내뿜었다. 그리고 일부는 무덤 속에 있던 그릴로의 시체와 만나 시체 태우는 냄새를 풍기면서 더 강렬하게 타오르기 시작했다. 그야말로 아수라장이었다.

무덤 밖으로 빠져나온 언노운은 눈대중으로 재빨리 바깥 상황을 살폈다. 그가 주시하고 있는 것은 폭군 그릴로였다. 불꽃이 타오르자 폭군 그릴로까지도 무덤 근처에 온 상황이었다. 무너진 무덤과 타오르는 불꽃에 집중하느라 언노운과 퀼츠의 존재는 아직 발각되지 않았다. 구름에 비할 수준으로 터져 나오는 연기는 그들의 모습을 감추기에는 더없이 이상적이었다. 눈과 불꽃이 만나면 대량으로 연기가 생길 거라는 언노운의 예상은 멋들어지게 적중했다. 연기는 그들에게 있어서 최고의 무대를 만들어 주었다. 시각적으로 그릴로들로부터 보호해줄 뿐만 아니라, 가장 중요한 점은 연기는 냄새를 가려준다는 점이었다. 다량의 연기 사이에서 퀼츠와 언노운의 냄새는 그릴로들의 코에 전달되지 못했다. 매캐한 연기 냄새가 워낙 강했기 때문이었다.

거기에 더불어 맹렬하게 타오르는 시체 냄새는 그릴로들의 예민한 후각을 마비시킬 지경이었다. 시체 타는 냄새만큼 독한 것이 없다. 피를 묻히며 살아왔던 언노운의 오랜 경험 중 하나였다.

퀼츠는 언노운에게 시선을 던졌다. 이제 어떻게 할 거냐는 물음이 담긴 시선이었다. 언노운은 고민했다. 지금 이 혼란 중에 이곳을 빠져나가면 괜찮지 않을까? 그러나 어려운 일이었다. 그릴로들의 시야의 사각을 통해 완전히 눈에 띄지 않게 이 부락을 빠져나가는 건 어려워보였다. 그의 눈에 보이는 것은 오로지 폭군 그릴로의 바위집 뿐이었다. 저기까지라면, 그릴로들에게 들키지 않고서 이동하는 것은 가능해 보였다.

언노운은 미리 봐두었던 폭군 그릴로의 바위집을 손짓으로 가리켰다. 폭군 그릴로는 이미 혼란 중에 바위집 바깥으로 나와 있었다. 폭군 그릴로는 패닉 상태에 빠진 그릴로들을 통솔하기 위해 뭐라고 소리치고 있는 중이었다. 언노운과 퀼츠는 그릴로들의 혼란을 틈타 쥐새끼처럼 재빨리 이동했다.

커다란 바위를 주먹으로 부수어 구멍을 낸 바위집은 나름대로 구색은 갖추어져 있었다. 바위집 안으로 들어가자 바닥에는 수십 장의 동물 가죽들이 깔려 있었다. 그리고 그 위에는 마른 풀잎들이 덧씌워졌다. 꽤나 편안한 잠자리처럼 보였다. 언노운은 폭군 그릴로의 집이 생각보다 괜찮아 보인다는 것에 놀랐다. 어쨌든 그것이 대수는 아니었다. 그는 집의 면면을 재빨리 훑은 후에 괜찮은 장소를 찾아내었다. 아직까지 혼란에서 벗어나지 못한 그릴로들을 보면서 언노운은 약간의 시간이 있다고 판단했다. 그는 퀼츠에게 설명했다.

“잘 들어. 너도 알겠지만 일격에 보내지 않으면 힘들다. 그리고 일격으로 보낼 수 있는 곳은 머리뿐이야. 목을 그어버리던지, 그대로 골통에 칼을 꽂아 넣던지. 어쨌거나 네 너클로 한 방에 저 녀석을 없애는 건 불가능하단 말이지. 알아들어?”
“크릉, 안다.”

언노운은 왼쪽 구석에 작은 구멍을 하나 찾아내었다. 그는 퀼츠에게 지시했다.

“최후의 일격은 내가 맡아야 돼. 그러니까 넌 시선을 끌어줘. 여기가 딱 안성맞춤으로 보이는군. 자, 이거 받고.”

언노운은 바닥에 깔려 있던 동물 가죽 하나를 건네주었다.

“그걸 덮고 구멍 속에서 잠자코 내 지시를 기다려. 나는 저 위에 있을 테니까. 내가 오른손 엄지를 들어 올리면 곧바로 구멍에서 뛰쳐나가서 시선을 끌어. 이 좁은 곳에서 오래 끌라고는 말 안하겠다. 십초. 딱 십초 안에 결판이 날 거다. 나는 저 위에서 대기하고 있다가 너한테 시선이 쏠리는 순간 뛰어 내려서 상황에 따라 녀석의 목덜미나 정수리에 대검을 꽂아 한 번에 죽이도록 하겠어. 알았냐?”
“크릉, 좋다. 십초란 말이지?”
“그래. 십초면 돼. 이빨나무 숲의 자랑스러운 놀의 전사라면 그 정도는 할 수 있겠지?”

퀼츠는 어깨에 힘을 주며 말했다.

“물론이다!”

언노운은 피식 웃었다. 그리고는 벽면을 타기 시작했다. 벽면이 울퉁불퉁해서 발을 디딜 곳도 있었고 손으로 잡을 곳도 충분했다. 그러나 그에게는 큰 문제점이 있었다. 언노운은 오른팔을 들려다가 멈칫했다. 그는 자신의 오른팔을 내려다보면서 이를 악물었다.

“제기랄.. 도무지 쓸모없는 자식이군.”

그는 왼팔만으로 가까스로 등반에 성공했다. 벽을 타고 올라간 그는 천장에 가까운 벽면 구석에서 크게 돌출된 돌부리를 찾아내었다. 그는 그 돌부리에 엉덩이를 붙이고 자리할 수 있었다. 오른팔은 도무지 움직여지지 않았기 때문에 그는 왼손으로 등에 멘 대검의 검 자루를 꼭 쥐고서 기다렸다. 왼손만으로 암벽을 오르면서 왼손에 무리가 갔는지 팔목에 고통이 심했다. 그러나 그 정도 고통이 그에게 문제가 되지는 않았다.

언노운은 퀼츠와 자신 사이의 거리를 대충 가늠해 보았다. 퀼츠가 뛰쳐나와서 폭군 그릴로의 시선을 끌면서 저쯤까지 이동하면.. 언노운의 머릿속에 퀼츠와 폭군 그릴로의 동선이 그려졌다. 바로 저기쯤. 저기쯤에 올 때 뛰어내리면 폭군 그릴로의 정수리를 정확하게 노릴 수 있다. 언노운의 팔에 힘이 들어갔다. 실수도 실패도 용납할 수 없다. 단 한 번의 기회를 살리지 못하면 둘 다 그 거대한 팔과 다리에 짓밟혀서 죽게 될 것이다. 언노운은 마른 침을 삼켰다.

바깥의 소란은 점차 잦아들고 있는 것 같았다. 폭군 그릴로의 영향력 덕분인지 패닉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 같던 그릴로들이 정신을 차리고 있었다. 폭군 그릴로의 고함 소리가 계속해서 들려왔다. 눈을 뿌리는 소리, 사그라지는 불꽃.. 언노운은 대략적으로나마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 지 알 수 있었다. 여전히 연기가 주변을 휘돌고 있는 것 같았지만 대충 진화가 된 모양이었다.

쿵쿵쿵쿵

언노운은 대검을 꽉 쥐었다. 오는가.

쿵쿵쿵쿵쿵

커다란 발소리가 가까워지기 시작했다. 대충 정리가 되었다고 생각한 폭군 그릴로가 집으로 돌아오고 있었다.

쿵쿵쿵

더욱더 가까워지는 발소리에 언노운의 입이 바짝바짝 말라왔다. 폭군 그릴로의 모습이 곧 드러날 것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폭군 그릴로가 자신의 집 안으로 들어왔다. 그 흉측한 얼굴을 들이밀고서 검은 털가죽을 휘날리는 그 모습은 가까이에서 더욱 더 큰 위압감을 자아냈다. 언노운은 크게 심호흡을 하고 셋까지 숫자를 세었다. 그리고 자신에게 준비를 끝마쳤다. 망가져버린 오른팔 대신 이 왼팔이 제대로 해낼 수 있기를. 그는 그렇게 마음속으로 기도하곤 힘들게 오른손의 엄지를 움직였다. 팔은 제대로 움직이지 않았지만 손가락은 어찌어찌 움직일 수 있었다.

폭군 그릴로가 퀼츠가 숨어있는 구멍 가까이에 다다랐다. 그리고 언노운의 오른손 엄지는 치켜 올라가 있었다. 설마 퀼츠가 보지 못 했나? 언노운의 검을 쥔 손이 쥐락펴락 하며 긴장감을 드러냈다. 그리고 그 순간, 구멍에서 민첩한 신형이 빛살처럼 튕겨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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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38.209.***)   2014-02-02 15:45:51
ㄷㄷ 5점
(123.199.24.***)   2014-01-31 22:56:59
그리고 빛살처럼 하늘로 사라졌고,미끼 역할은 성공적이었습니다.
아아 그놈은 참 멋진 친구였어-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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